음운론 · 언어와 사회 · 한국어
언어 놀이
Language Play
언어는 '소리'라는 형식과 '의미'라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언어의 기본 기능은 의사소통이므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의미에 초점을 두고 문장을 구성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즉 의미적으로 연관된 단어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문장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만약 소리에 초점을 두고 음성적 연관성을 가진 단어들로 문장을 구성한다면, '달이 달달하게 달린다' 혹은 '왜가리가 가리비를 가리킨다'와 같이 의미 없는 문장이 만들어질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역사학/철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놀이의 인간)'로 명명했듯이, 고등동물로서 인간의 특징 중 하나는 '유희'를 즐긴다는 것이다. 즉 본래의 목적과 상관없이, 여기서는 의미와 상관없이, 소리의 연관성만을 가지고 표현들을 만들어 낸다. 2025년 봄에 유행했던 'Italian Brainrot'은 이러한 유희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트랄랄레로 트랄라라(Tralalero Tralala)', '봄바르디로 크로코딜로(Bombardiro Crocodilo)', '리릴리 라릴라(Lirilì Larilà)', '침팬지니 바나니니(Chimpanzini Bananini)', '카푸치노 아사시니(Cappuccino Assassino)', '트리피 트로피(Trippi Troppi)' 등을 보면 동일하거나 유사한 소리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어 단어처럼 보이는 이 표현들은 실제 단어가 그대로 사용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단어들을 살짝 비틀어 소리를 맞춘 형태이며 '폭격기+악어'나 '커피+암살자'처럼 의미적으로는 연관이 없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Italian Brainrot을 보고 말 그대로 '뇌가 썩는'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즐기며 확대재생산하였다. 이러한 언어유희는 당연히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가깝게는 우리가 즐기는 노래들에 등장하는 라이밍(rhyming)을 예로 들 수 있다. 싸이의 '나팔바지' 중 내 '여자는 쌈빡하지'와 '내 바지는 나팔바지'가 댓구를 이루면서 마지막 '아지'가 라임으로 맞춰져 있는데 의미적으로는 큰 연관이 없어 보인다. 가장 극단적인 곡으로는 형돈이와 대준이의 '한 번도 안 틀리고 누구도 부르기 어려운 노래'가 있다. 가사를 들어보면 의미는 온데 간데 없고 따라하기 힘든 말소리의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너를 처음 만난 그 날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재임 시절 확률분포표상에는
있을 수 없는 청 단풍잎이 우거진 붉은 수수밭에서
수사슴 수사에 붙은 수수료가 얼마인지
알아보기 위해 간 그곳이었지
너의 얼굴은 마치 페니실린 살균 항균작용을 한 듯
하얗고 입술은 붉은 팥 풋 팥죽처럼 고왔어
그 시절 박남정 춤을 추며 안흥팥찐빵을 먹던
네 모습은 마치 내게 접근금지라고 말하는 듯했어
하지만 이내 우리는 강력접착제처럼 철수 책상
철 책상에 앉아 서로를 액자 속 사진 속에
홍합을 나눠 먹으며 그렇게 그렇게 행복해했지
이렇게 소리를 맞추면서 의미적으로도 말이 되게 만들면 좀 더 우아한 라이밍이 완성되고 그러한 라이밍은 영시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현대의 영어로 된 곡들에서도, 특히 힙합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고 한국어로 된 노래들에서도 발견된다. 물론 동양의 한시에서도 오래전부터 '각운'이라는 형태로 존재해 왔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언어를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도 이용하는 것일까?
앞서 기술했듯이 인간의 '유희의 동물'이다. 그리고 그 '유희', 즉 놀이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줄 뿐 아니라 인간의 창작을 돕고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도 했다. 위에서 제시한 Italian Brainrot의 예처럼, 기능적인 관점에서는 연결할 이유가 전혀 없는 개념들을 연결했을 때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개체들이 탄생하고, 이는 더 큰 상상력으로 연결된다. 아르키메데스가 왕의 요청으로 왕관에 은이 섞여 있는지 고심하던 중 목욕탕에 들어가 물의 흘러넘침을 보고, 즉 이전에는 상관없이 보이던 두 사건의 연관성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상어를 보고 유레카를 외치게 된 것이다. 비록 그 연결이 가져다 준 것은 그저 웃음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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