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면서도 같은 언어 II

글 5 | 2026년 5월
필자 또한 영어를 30년 이상 학습해 왔고, 또 15년 이상 가르치고 있기에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배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 어려움은 당연히 두 언어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개별 언어들이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다. 언어들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의 ‘자의성’에 있다. 언어는 ‘의미’와 ‘형식’으로 구성되는데 그 둘 사이에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날개가 달려 일반적으로 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의미와 ‘새’라는 음성이 연결된 것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우연한) 약속일 뿐, 필연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같은 의미가 언어에 따라 ‘bird’(영어), ‘oiseau’(프랑스어, 굳이 한글로 쓰자면 [우아조]), 또는 ‘とり’(일본어, 한글로 쓰자면 [토리])라 불리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면 최소한 수백 개, 또는 수천 개의 이 자의적인 관계를 익혀야 하고, 이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물론 이것(단어) 외에 다른 어려움들(예를 들면 문법)도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그러나 언어학을 공부할수록 서로 너무나 달라 보이는 언어들이 사실 매우 닮아 있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언어의 자의성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와 반대의 개념인 ‘도상성(iconicity)’도 언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상성은 ‘iconicity’라는 단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icon’이라는 단어는 컴퓨터 화면에 띄워있는, 프로그램 또는 앱을 나타내는 그림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데 그 그림만 보아도 무슨 일을 하는 프로그램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의미’인 프로그램과 ‘형식’인 작은 그림이 필연적, 직관적 관계로 이어진 경우에 우리는 ic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언어에 도상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형식에 반영될 때 확인할 수 있다. 언어의 도상성으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예는 형용사의 순서다. 명사 앞에 여러 개의 형용사가 나열되어 그 명사를 꾸밀 때, 형용사들을 아무런 순서로 배치하지는 않는다. ‘법칙’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어민 화자가 선호하는 순서가 있는데 영어의 경우 의견(beautiful, lovely), 크기(small, big), 나이(old, new), 모양(round, sqaure), 색(red, blue), 기원(French, American), 재료(wooden, metal), 그리고 용도(reading, cooking)순으로 배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형용사들 다음에 명사가 오기에, 뒤쪽에 배치되는 형용사는 오히려 명사와 가깝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형식상으로 명사에 가까운 형용사는 의미상으로도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물의 용도, 재료, 기원은 그 사물이 존재하는 한 일반적으로 변경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의견이나 크기는 보는 사람이나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그 사물의 본질이라 보기 어렵다. 나이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므로 핵심적인 속성이라 말하기 어렵다. 모양과 색은 의견, 크기, 나이보다는 보수적이나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정리하면, 명사의 속성을 제시하는 형용사들은 의미적으로 그 본질에 가까울수록 형식상으로도 명사에 가까운 곳에 나타난다.[5] 또 다른 흥미로운 예는 다음 한국어와 영어의 두 문장에서 나타난다. 그는 촛불을 불어서 껐다. He blew the candle off. 각 문장에는 원인(불다)과 결과(끄다)가 들어있는데 한국어에서는 원인이 보조동사(불어서), 결과가 주동사(껐다)로 표현되어 있으나 영어에서는 원인이 주동사(blew), 결과가 구동사의 particle(off)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동사를 마지막에 두는 한국어와 동사를 목적어 앞에 두는 영어의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언어 모두 원인을 앞에, 결과를 뒤에 두게 된다. 이는 인간의 인지체계에서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뒤서는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의미(사건의 인지)와 그 형식(사건의 배열)이 일치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보자. 나는 3km를 달렸다. 그 사과는 나를 줘. I ran 3km. Give me the apple. 첫 문장에서 ‘달리다(to run)’은 자동사임에도 목적어를 취하고, 마지막 문장에서 ‘나(me)’는 주어지는 물건이 아니고 물건을 받는 사람임에도 목적어로 제시된다. 엄밀히 말하면 목적어가 나오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목적어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동사와 (목적어의 형태로 나타난) 명사(혹은 대명사)들과의 의미적 관계가 형식적인 통사적 관계로 전이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즉 ‘달리다’는 동사는 거리와 자주 사용하게 되면서 의미적으로 매우 가까워지고, 그 의미적 근접성이 통사적으로도 실현되었다고 본다. 통사구조 상에서 동사와 가장 가까운 것은 목적어이기 때문이다. ‘주다’의 경우에도 그 의미적 특성상 ‘-에게’에 해당하는 사람이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받는 사람’이 동사와 갖는 의미적 근접성이 통사적 근접성(목적어)으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고등학교 영어시간에 5형식을 기초로 영문법을 배운 우리로서는 ‘주어+동사+간접목적어+직접목적어(She gave me the book)’ 형식이 기본이고 ‘주어+동사+직접목적어+to간접목적어(She gave the book to me)’ 형식이 기본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즉, 한국어에서처럼 ‘-에게’에 해당하는 ‘to-’가 나타나는 것이 기본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4형식은 이 구문으로부터 도출되어 나타났다고 본다. 결국 두 언어에서 변화의 방향은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의미적 근접성이 통사적 근접성으로 실현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언어에 자의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상성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자의성에 비해 그 예도 적고 확인하기도 힘들기는 하지만. 언어는 자의성이라는 ‘약속’ 위에 세워진 집이지만, 그 집을 채우는 가구들은 도상성이라는 ‘본능’에 따라 배치된다. 자의성이 언어에 개성을 부여한다면, 도상성은 언어에 보편적 공감대를 부여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의성에 기반을 둔 언어의 특성보다 더 흥미롭다. 수천 년 동안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언어들이 결국 비슷한 문법적 장치를 갖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같은 인간의 뇌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언어 속에서 발견하는 도상성의 흔적들은, 우리가 서로 다른 말을 쓰면서도 왜 결국 같은 인간으로서 소통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5] 이는 언어학자 John Haiman이 주장한 ‘인지적 거리와 언어적 거리의 일치’ 원칙이다. 자료는 연재훈(2021) 언어유형론 참고.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